충격과 공포의 근황 보고. 모두들 문단속 조심하세요.

집에 도둑이 들 뻔했습니다.

스펀지 2.0의 '무서운 스펀지' 코너에서 도둑들이 도어락을 여는 수법이 방영된 후에 제가 사는 아파트 동 엘리베이터 CCTV가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사진을 입수했으니 자진신고를 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두 번에 걸쳐 통보를 했습니다. 최후통보가 떨어진 날,
그저께 새벽 1시 45분 경, 왠일인지 이불을 덮어도 방이 으스스한 느낌이 들더군요. 초침 소리에도 잠을 못 자는 제가 깨지 않을 수 없었죠. 멍한 정신으로 몸을 일으켜 보니 창문이 열려 있고 들썩들썩거리는 소리가 나더군요. 바깥 복도 쪽을 쳐다보니



누가 한 손으로는 방범창을 잡고 한 손으로는 손전등으로 창문 너머의 절 비추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안방으로 달아났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 비명에 깨셔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 건지 '술에 취한 사람일 거다'부터 시작해서 '마누라가 집에 안 들여보내줘서 깽판을 부린 거다'라고 농담을 늘어놓으셨습니다만(그 상황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하실 수 있는 어머니의 낙천성을 부러워해야 할지 참……) 저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어서 그 날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도 불안해하는 제가 걱정되신 모양인지, 이모네서 자고 와라, 택배가 와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마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그 사건에 대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대해서 얘기하니, 관리사무소 측에서는 범행의 열악한 수법을 들어 별로 위협적인 도둑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아니, 세상의 모든 피해자가 범인보다 멍청해서 사고를 당합니까 그래? 오히려 평소에 누가 절 좋아하는 사람이 없냐며, 스토커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더 기분 나쁘거든요?)
CCTV를 망가뜨린 청년은 관리사무소에 자진신고를 했고, 그쪽 일은 알아서 잘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불안해요. 그 청년이 제가 창 너머로 마주친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했거든요……. 절도범이건 강간범이건 스토커건 재범률이 높은 이상 안심할 수는 없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제 집은 아버지가 안 계시고 여자만 둘이라서 유사시에는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구요.
어머니는 저를 복도 쪽 방에 혼자 둘 수 없으셨는지 하룻동안 같이 자 주셨지만 싱글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방이라서 무지 갑갑했습니다(…). 미안해요 마망.
오늘 사촌 오라버니께서 어머니의 부탁으로 방범창을 달러 왔는데, 저는 방범창 위쪽을 보고 오싹했습니다.

나사 두 개가 풀려 있었어요. 사촌 오빠가 방범창을 흔들자 들썩 들썩 흔들렸습니다.
위기탈출 넘버원에서도 뺀찌로 방범창을 부러뜨리는 장면을 방송한 바 있으니 문단속 철저히 하세요.

분명 범인은 그 시각 창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습니다. 문고리 하나밖에 잠그지 않은 문을 내버려두고 굳이 창으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단순히 준비성이 부족했던 걸까요? 만에 하나 제가 그 때 깨어나지 않았으면 제가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었을까요……. 범인이 달아날 거라고 생각해서 질렀지, 아님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어머니는 이번 일요일날 바깥쪽에 방범창을 하나 더 달고, 문고리를 바꾸시기로 했습니다. 관리사무소에는 아파트 동에 도둑이 들었으니 조심하라고 방송을 하겠다고 합니다.
도둑질 당할 뻔한 때에는 조용하던 옆집 개가 지금 짖으니 참 야속하기만 하네요.

CCTV를 파괴한 범인이 자수를 했다고 합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걸리적거리는 게 있어서 부쉈댑니다. 갓 군을 제대한 젊은 남자라고 하는데, 어머니께서는 그 사람을 잠정 범인으로 지목하고 계십니다.
부디 일요일까지는 별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한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한밤중에 문이 잠기지 않은 집을 찾아 들어가 연쇄살인을 하던 범인의 말.

'문이 잠겼다는 건 환영받지 못한다는 뜻이잖아요.'

by Ichor | 2008/05/16 19:11 | 잡답/문답 | 트랙백 | 덧글(1)

<판타스틱 포츈> 후지와라 메이




출연작은 판타스틱 포츈 1. '아마도' 업계 최초의 여자 이고깽 역할렘물 주인공. (…)

등장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평범하다……? 누가 그랬나? 알고 보니 부잣집 딸내미에 얼굴이 밝혀지지 않은 남동생(!)도 있는 표준적인 주인공 스펙의 캐릭터. 다만 스토리상의 중요도는 유우키 아즈사의 편애를 받는 디아나에게 밀리는 것 같다. 국내에서는 실피시의 인기에 밀리지만 일본에서는 성우 사카모토 마야의 후광인지 가장 인기가 좋다.
코스츔은 등장 캐릭터 전체를 통틀어 춘추복도 동복도 가장 멀쩡한 디자인. 가장 멀쩡한 옷을 받은 대가로 여름까지 그 더워보이는 긴팔옷을 입고 있으며, 코스츔이 바뀌는 건 가을에나……. 그런데 동복보다 춘추복이 더 따뜻해 보여서 안구에 습기찰 따름이다. 부잣집 장녀 주제에 용돈 5만원(한글판에서. 일본판을 플레이해보지 않아서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다)밖에 못 받아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는데, 이고깽 타이틀을 달아서도 나아진 게 없다니 서글프기 그지없다.

게임 상의 모든 캐릭터에게 민폐계라는 첫인상을 남겨주는 포지션. 근데 말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기, 몰래 나다니기, 숙제 미뤄두기 정도가 민폐인가? 사소한 일을 미뤄둘 뿐이지 자기 해야 할 일은 다 하는 것 같은데. 범차원적 민폐 캐릭터가 판치는 오타쿠 세상에서 그 정도는 귀여운 수준 아닌감. 하긴 다른 캐릭터로 말을 걸어보면 약간 상대하기 곤란하다고 해야 하나, 애가 성격은 밝은데 속이 은근히 꼬여있다. 암울한 신세에서 현실도피를 하기 위해 밝은 성격을 가장하고 있다느니…… 이런 구식 설정을 대며 꼰다는 게 아니고, 소악마다. 소악마. 다른 주인공들이 여기저기서 조롱받고 혼나고, 제대로 반격을 못하는 반면 메이는 무슨 소리를 들어도 그 이상을 돌려준다. 특히 은근히 깎아내리는 발언을 잘 하는 시온과 맞붙을 때가 가장 재밌다.
어느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고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는 태도가 꽤 맘에 드는데, 반대로 말하면 계급제인 클라인에서는 '동등한 입장으로 대한다'는 게 '버릇 없다'는 게 된다. 뭐, 하는 짓이 약간 버릇 없긴 하다. 철없는 여고생이라는 걸 감안하면 커버 가능한 수준.

캐릭터 조형과 설정은 세 주인공 중 가장 잘 뽑혀 나왔는데 정작 스토리 면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진엔딩 루트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꽃피우는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메이의 진엔딩은 메이의 성장을 잘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저 발랄하고 조금 약게만 보이던 메이가 할 때는 하는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과, 마법 실력이 성장했다는 가늠밖에는 할 수 없다. 강대국과의 전쟁에 세상에서 한 명 밖에 없는 이계인을 개입시켜 전쟁터로 몰아간다는 것도 상당히 개연성이 떨어지는 시나리오고. 무엇보다 다른 주인공들은 왕비, 여왕, 혹은 여기사, 영웅이라는 두 가지 출세가도가 있는데 왜 메이는 진엔딩이 하나밖에 없는가! 메이에게도 붉은 숄의 마도사 엔딩을 달라!(메이 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한 때 웹링까지 만들 정도였다) 열심히 플레이해서 진엔딩을 본 대가가 가족이 벌써 장례식을 치뤘다는 소문이냐! 전혀 보상이 안 되잖아!
배드엔딩도 가관이다. CG는 귀엽지만 내용이……. 선생이자 친구이자 엊그제까지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키엘은 아이구 속이 시원하다 이러지(게임 내에서 유일하게 키엘이 미웠던 순간), 보내도 인간형 생물조차 없는 세계에 떨어뜨리질 않나(!) 추남에게 시집가도 왕족은 왕족인 디아나와, 그저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인 실피시에 비하면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2편에선 똑같은 설정의 아오이도 똑같은 배드엔딩을 맞는다.

다른 두 주인공에 비해 엔딩 작화가 하도 안 예뻐서 '메이는 유우키 아즈사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설이 팬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런 얘기가 나와도 무리가 아닌 게, '엔딩이 엔딩 같지 않다'. 이벤트에 있어야 할 그림이 마지막 부분에 잘못 삽입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엔딩들뿐이다. 디아나와 실피시 시점의 엔딩 CG는 '그리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의 기분 좋은 안도감을 준다. 그에 비해, 메이의 엔딩 CG는 오히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맺어지기 전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을 묘사하는 것 같아서 쇼크를 일으킨다. 그나마 유일하게 엔딩다웠던 게 시온 엔딩이었다.
내 생각에는 유우키 아즈사는 단지 남녀를 불문하고 장발팻치이기 때문에 단발인 메이를 예쁘게 그리지 않은 듯 싶다(…). 후속작인 아포크리파/제로에서는 사피알렉 엔딩에서 키엘메이 엔딩을 능가하는 충격을 느꼈다(ps 2판에서는 CG가 바뀌었지만 그것도 썩 예쁘지는 않다). 메이 장발버젼인 로도는 예쁘게 그렸는데!

평범한 듯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진 캐릭터. 초반 난이도가 어렵다고 하여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주인공인데, 초반에만 좀 빡세지 중반 이후에는 어차피 똑같다(…). 난이도보다는 세계관의 이해를 위해서 디아나로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by Ichor | 2008/05/16 10:33 | 오늘의 乙女心 | 트랙백 | 덧글(1)

<판타스틱 포츈> 키엘 세리언




출연작은 판타스틱 포츈 1.
캐릭터는 전형적인 냉정한 안경 우등생에다 시쳇말로 츤데레. 하지만 이 캐릭터의 홍조를 바라고 공략하면 틀림없이 실망한다. 여타 츤데레 캐릭터가 중반 이후엔 온갖 시시한 이유를 대서라도 급변하는 것에 비해, 이 캐릭터는 자기 이벤트와 엔딩 이외에서는 절대(!) 홍조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무리 친해져도 틱틱대는 강도가 약해질뿐, 줄곧 차가운 태도를 견지한다.
초반에 싸늘하던 다른 공략대상들이 게임 중반쯤에는 모두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는 것과(심지어 게임 내에서 내면적으로 가장 냉정한 캐릭터인 시온마저도 태도가 바뀌는데) 비교된다. 공략 난이도는 판포 1의 캐릭을 다 통틀어서도 1, 2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쉽지만 엔딩의 짠한 감동과 달성감은 심지어 트루 엔딩조차 능가한다. 괜히 인기투표 1위인게 아니다.

타치에는 16~17살쯤으로 보이는데 가끔 작붕이 일어날 때에는 원래 나이대로 보일 때도……. 날이 선 성격과 신랄한 말투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보다 훨씬 귀여운 외형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둥그스름하고 새침한 눈매. 유우키 아즈사 특유의 부드러운 듯 날카로운 감각을 잘 살린 페이스다. 복장 센스도 춘추복만 놓고 보면 공략대상 중 가장 센스가 좋다. 붉은 숄로 자칫 어두워보일 수 있는 색조를 커버한 것은 좋은 선택이다. 디자인보다 '마법사'라는 지적인 이미지를 제대로 표현한 복장이어서 마음에 든다. 그러나 긴팔 하복은 적잖이 에러. 응원단복 같다. (…)
외면만 매력적인 게 아니라 평상시 회화도 재미있다. 남을 약올리기 좋아하는 만큼 화내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적어도 화를 내는 상대는 어느 정도 터놓은 사이라는 반증이라 오히려 즐겁다. 키엘의 성격에서 가장 소년다운 면이고, 대화가 재미있어지는 요인(그래서 별로 빈정거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실피시와의 대화는 정말로 재미없다……). 또, 디아나와의 커플링은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디아나 시점에선 경어 속성이 붙는 게 즐거워서 놓칠 수 없다. 어떨 땐 메이보다도 더 재미있을 때도.
내 취향에 스트라이크 존인 캐릭터기에 별로 흠을 잡고 싶지는 않지만, 키가 167이라는 점은 좀 아깝다. 아담한 캐릭터 좋아하지만 요즘 시대엔 너무 작아.

주인공들과의 커플링은 세 명 다 나름대로 각자의 팬층이 있으나, 공식커플인 메이와의 커플링이 가장 인기가 많다. 나도 메이와의 커플링을 지지한다. 디아나와는 키엘이 너무 일방적으로 화를 내기만 하는 구도라 연애라기보다 코미디 같고, 실피시와는 둘 다 수동적인 성격이라 그림은 그려지는데 진도가 안 그려진다. 무엇보다 메이 고백 이벤트에 비견될 만한 고백 이벤트가 나머지 둘에게는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절절하게 울리는 디아나&실피시 고백 이벤트가 더 맘에 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키엘답게 담담하고 깔끔한, 할 말은 다 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최대한 아끼는 메이 편에서의 고백 이벤트를 훨씬 좋아한다. CG도 훨씬 예쁘고.
메이 엔딩의 고백 CG는 의도적으로 흐릿한 배경 색감과 키엘의 아련한 표정이 잘 어우러져 고백의 침착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말이 많은 엔딩 CG는……. '이벤트 CG를 엔딩 부분에 넣는 게임이 어딨어!'라고 외치고 싶은데, 바로 메이 엔딩'들'이 그렇다. 거의 대부분의 엔딩 CG가 그 모양이다. 그래도 공식 커플 엔딩씬 정돈 예쁘게 그려주지!

키엘 이벤트의 절정은 고백보다는 도서관에서 잠든 키엘을 깨우는 부분이다. 쌀쌀하기만 한 키엘이 처음으로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시기인데, 캐릭터 표현이 정말 잘 되어 있다. 키엘의 자학적이고 여린 면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가드가 풀려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감정선을 밀고 당기며 놓지 않으려는 점이 귀엽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메이 시점에서의 백룡 소환미수 이벤트.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 앞에서 섣불리 슬픔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모습만으로도 애처롭기 그지없는데 한술 더 떠 메이가 키엘 바로 앞에서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결의를 다지는 아이러니한 구도로 한층 안타까움을 더한다.
더욱 잔인한 점은 키엘 공략가능 선택지인 '돌아가지 않는다'를 선택하면 곧바로 자동이벤트가 발생해서 키엘 엔딩으로 직행한다는 것. 메이로 플레이를 했을 시, 정상적으로 진행했다면 가을로 넘어가자마자 백룡 소환미수 이벤트가 일어나니 좋든 싫든 키엘이 첫 엔딩대상이 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다른 캐릭터 엔딩을 보려면 키엘을 눈앞에 두고도 놓아야 한다. 따라서 중후반부 이후로는 동시공략이 불가능. 공략의 효율성 면에서도 손해가 막심하다. (…)
연애게임에서 동시공략이 된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아는가! 캐릭터 수명을 늘린다는 이유로 원천적으로 동시공략을 봉쇄하는 요즘 게임들은 반성해야 한다!

안경 캐릭터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캐릭터. 그로밋을 제외하고는 2D 캐릭 중에서는 첫사랑이라고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있다. 세월이 10여년이나 흐른 지금도 다섯 손가락 내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by Ichor | 2008/05/14 04:44 | 오늘의 乙女心 | 트랙백 | 덧글(0)

<감상평> Fantastic fortune(판타스틱 포츈)








1998년도에 발매된 오토메 게임의 고전. 국내에 정발되어 게임피아 번들로 제공된 바 있고 EBS 성우들의 국어책 읽기를 만끽할 수 있었던 추억의 게임이다. 현재에도 주얼로 팔리는 몇 안되는 게임. 들여올 당시의 패키지 가격은 25000원으로 기억하나, 잘 안 팔렸는지 9900원으로 하락하여 동네 서점에서 팔렸다. 오토메 게임 역사에 획을 그었으며, 나이 좀 들었다 싶은 사람들은 이 게임으로 오토메게에 입문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지금 세대에서도 입문작으로 추천할 만큼 잘 만들었다.
제작사는 후지쯔. 에베루즈 시리즈의 워랜드 세계관과 연계되는 작품이나 기존 시리즈와 타겟이 워낙 달라 게임 간의 연동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조금 안타깝다. 그러나 화사하고 따사로운 중세풍의 분위기는 확실히 계승했다. 주인공이 3명이라는 요즘 게임에서도 보기 드문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는데, 주인공마다 확실한 개성을 부여한 점이 점이 획기적이었다. 세 주인공들은 공주, 기사견습생, 차원이동한 일본의 여고생 등 직업, 입장, 성격이 모두 달라 같은 캐릭터를 공략해도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이 점이 커플링에 목마른 여성 게이머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어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발매 후 10년 된 지금 생각해봐도 캐릭터의 개성과 매력의 표현 면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시나리오 자체의 질은 지금 기준에서도 평작 이상(만약 오토메 게임계가 지속적으로 명작을 배출했다면 평가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두서없이 쓰여진 티가 나지만 크게 흠잡힐 만한 정도는 아니다. 플레이시간이 길지 않아서 반복 플레이에 부담이 없고 공략 캐릭터도 7명이나 되니 게임 전체의 볼륨도 작지 않다. 적지 않은 캐릭터 수에도 불구하고 소홀하게 만들어진 루트가 없다는 점도 높이 살만한 요소(가젤 루트는 좀 날림이긴 했다). 여러 모로 시대를 앞서간 게임이었다. 객관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게임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출시된 지 10년이 넘도록 이 게임보다 질적으로 나은 오토메 게임이 별로 없다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캐릭터 면에서도 이것저것 속성을 섞어서 어설프게 만든 게 아니라, 한 캐릭터당 하나의 속성으로 밀어붙여서 취향대로 편하게 몰두할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든다. 캐릭터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성을 밀어붙이기보다 이상형적인 면모를 어필함으로써 호감을 산다. 깊은 정은 들기 어렵지만 좋은 평가를 내리기는 쉬운 캐릭터메이킹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호감만 주려다 보니 임팩트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엔딩을 보고 나면 쉽게 인상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으나, 적어도 플레이하는 동안만은 여심을 흔들기엔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래픽 또한 지금 내놔도 괜찮은 수준. 어째 유우키 아즈사의 현재 그림체보다 얼굴 조형이나 색감 면에서 더 낫다고 생각되는 건 나뿐인가? 의상 센스는 지금 봐도 충격적인 옷이 몇 벌 있지만(가령 실피시의 형광연두색 하복이라던가) 유우키 아즈사가 디렉터를 맡은 후속작들에 비하면 양호하다.

단점은 게임 진행이 지루해 CG 컴플리트가 쉽지 않다는 점. 하도 옛날 게임이다 보니 스킵 기능을 지원하지 않으며(워낙 동시공략이 쉬운 게임이다 보니 동시공략 세이브 파일을 만들어 놓으면 재플레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한글판에서는 2월 발렌타인 이벤트에서 진행이 안 되는 버그가 있었다. 패치의 개념을 전혀 몰랐던 어린 나는 무한 로딩을 반복하며 자괴감에 빠져 있었지. 어렵게 패치를 구하고 나서도 CG 수집률에는 진척이 없었다.
이 게임, 육성 시뮬레이션의 필수인 '집에서 휴식' 커맨드가 없다. 오로지 공략대상들과 수다를 떨어야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플레이 기간이 3월 말까지인데, 길어도 11월에는 공략에 필요한 모든 능력치와 호감도가 다 채워진다. 최대 1월달까지 볼만한 이벤트 다 보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자유행동->외출->내 방의 무한 클릭 노가다를 해야 한다. 각 캐릭터별 엔딩을 보고 접으려는 사람들은 최장 1월달까지 엔딩을 보고 끝낼 수 있지만, 나처럼 100%에 집착하는 사람은 인내심을 적잖이 시험받게 된다. 적어도 난 판포를 플레이하면서 CG를 다 모은 기억이 없다. 더군다나 세이브/로드도 1주일에 한번밖에 하지 못해서 일상 플레이도 좀 번거로운 감이 있다.
또, 반복 플레이에 싫증을 잘 느낄 유저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 주인공을 바꾸어도 대사가 달라질 뿐 시나리오의 틀은 크게 바뀌지 않다 보니(기껏해야 다른 주인공 시점에서는 밝혀지지 않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밝혀지는 정도지만, 안다고 해서 공략대상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크게 감흥가는 것도 없다) 점점 캐릭터에게서 받는 인상이 흐려지고 감흥이 사라져 신선함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익숙한 것은 쉽게 진부해지는 법이다.

한글판 더빙에 대해 말이 많은 편인데 발매년도를 감안하면 대체로 그럭저럭 들을 만한 수준이다. 개인적으로는 세리오스 성우와 키엘 성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모두가 공인하는 미스캐스팅은 이리스와 레오니스 성우. 둘 다 캐릭터는 충분히 매력적인데도 불구하고 성우 때문에 인기를 좀 깎아먹었다. 특히 이리스 성우의 경우 외모와 목소리의 시너지 효과 때문에 사람에 따라 백합 무드를 느낄 수 있는데, 이걸 버티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레오니스의 경우엔 메인 히어로 3인방에다 미중년이라는 설정 때문에 캐릭터 선호도 세 손가락 안에는 언제나 들어있었으나 목소리에 불만을 토로하는 의견이 꾸준히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리스보다 더 공략하기 버거운 목소리였다. 남자들이 로리를 좋아하지 어린애를 좋아하는 게 아닌 것처럼, 여자들도 오지를 좋아하지 아저씨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요즘에는 모르는 사람이 꽤나 많던데, 다른 오토메 게임에 비하면 그나마 구하기 쉬운 편이니 관심 있는 사람은 구해서 해보기 바란다. 캐릭터의 모에 속성을 스탠다드로 살렸다는 점에서 거쳐볼 가치가 있는 게임이다. XP 호환이 되는 버젼과 안 되는 버젼이 따로 있는데, 비스타에서 될지는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팬들 사이에서 3명의 주인공 중 진 주인공이 누구인가가 꽤나 논란거리였다. 개인적으로는 디아나라고 생각한다. 디아나 진 엔딩을 봐야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째 유우키 아즈사가 제일 밀어주는 커플은 세리오스×디아나인 것 같은데 어째 제일 텍스트 상에서 정성이 들어간(최소한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쪽은 키엘×메이란 말이지…….
아포크리파/제로의 알렉도 그렇고, 유우키 아즈사는 왜 자신이 가장 밀어주는 캐릭터와 커플의 일러스트를 예쁘게 그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애들 생긴건 그게 그건데 미인 설정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예쁘다고 설정된 애들만 예쁘게 그리는 듯.

후속작인 판타스틱 포츈 2는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불편한 시스템과 연애 게임으로서 캐릭터 모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좋은 평가를 별로 못 받았다. 2가 특별히 떨어져서라기보다 1에 비교해서 그다지 나을 게 없는 시스템에(전작보다 덜 지루한 건 인정한다만, 체감상 오히려 더 불편하다고 느꼈다) 캐릭터의 조형조차 전작에 미치지 못한다. 어차피 전작과는 세계관을 제외하고 이어지는 설정이 없으므로, 전작에 대한 향수를 가지신 분들께는 권하지 않는다.

by Ichor | 2008/05/13 14:34 | 오늘의 乙女心 | 트랙백 | 덧글(1)

근황

1. 블로그에 悟悳계 카테고리를 만들까 생각 중. 오토메게 관련 리뷰를 올릴까 생각하고 있긴 한데 이쪽 게임들이 워낙 물량이 적어서 언제까지 기획이 계속될런가 모르겠습니다. 소재가 떨어지면 여성향계 전반으로 옮겨갔다가 정 올릴 게 없으면 BL, 남성향, 야겜, 심지어는 제 흑역사에 이르기까지 포스팅소재는 무차별 간택될 예정이오니 마음껏 사랑과 애정을 담아 '어휴 덕후냄새'해주세요. 쓸데없이 기합을 넣는 제 글의 특성상 평소 포스팅과는 재미나 길이 면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을 거고, 자주 업데이트되지도 않겠지만 이쪽 계열에서 동지 구하기 힘든 마이너의 처절한 발버둥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제가 요즘 좀 같이 버닝할 대상에 굶주렸구요. 무간지옥보다 더 긴 마이너 한 길을 혼자 가려니 좀 억울해서.^^;

2. 친구랑 아이언맨을 보러 대한극장에 다녀왔습니다. 영화 감상평은 곧 올릴 거구요. 간단히만 말하자면 저 성격으로 시빌 워에서 골목대장역을 하며 캡틴 아메리카랑 스파이더맨을 밀어붙였단 말인데 좀 상상이 안 되네요……. 아, 초딩이 좀 무섭긴 하지.
영화 끝나고 친구랑 돈까스를 같이 먹었는데요. 이상하게 저는 가게에서 파는 돈까스가 체질에 잘 맞지 않나 봅니다. 친구랑 지인들과 3~4번은 넘게 먹었는데 도저히 속에서 안 받아주는 거 있죠. 슈퍼에서 파는 일반 가정용 돈까스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왜 외식은 체질상 안 받나 모르겠습니다. 돼지고기 자체를 안 좋아하긴 하는데 굽는 건 또 입맛에 맞지 않다 뿐이지 잘 먹거든요. 튀김옷 입은 다른 음식도 별로 싫어하지 않는 편인데도 그러구요. 이유가 뭘까요. 참 미스터리하기도 하죠.

3. 누구시온지 모르겠사온데 없는 거 아시면서 왜 매번 제 블로그에서 ㅂㅁㅈ를 검색하시나이까?

4. 레몬펜 다 좋은데 스크롤에 붙어다니는 게 좀 집중 안 되네요.; 우려했던 속도 저하는 크게 느끼지 못하겠어요. BGM 까시는 분들이 쓰시면 더욱 버벅거릴 것 같긴 하지만요.

by Ichor | 2008/05/12 02:24 | 잡답/문답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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